보들레르 – 우울 (Spleen)

뚜껑처럼 낮고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이
오랜 권태에 시달려 신음하는 영혼을 짓누르고,
모든 땅을 감싼 지평선으로부터
밤보다 더 음침한 검은빛을 퍼붓는다.

대지는 축축한 토굴로 바뀌고,
거기서 희망은 박쥐처럼
겁먹은 날개를 이 벽 저 벽에 부딪히고
썩은 천장에 제 머리를 박아대며 날아다닐 때,

끝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는
거대한 감옥의 쇠창살을 닮고,
더러운 거미들은 묵묵히
우리 머릿속 깊은 곳에 그물을 칠 때,

별안간 종들은 성난 듯 펄쩍 뛰며
하늘을 향해 무섭게 울부짖는다.
악착같이 불평을 늘어놓는
고향을 잃고 떠도는 망령들처럼

그리고 북도 음악소리도 없는 긴 영구차들이
내 넉 솏을 조용히 줄지어 간다.
희망은 꺾여 눈물짓고, 포악한 고뇌는
푹 숙인 내 머리 위에 검은 깃발을 꽂는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년 4월 9일 – 1867년 8월 31일)는 일생을 번뇌 속에서 살았다. 어릴 적 아버지의 죽음, 곧 이은 어머니의 재혼, 여자친구인 잔 뒤발과의 불안정한 연애, 늘어가는 빚으로 인한 궁핍한 생활, 갑자기 찾아온 병마 등의 인생의 시련은 보들레르를 정신적으로 힘들게했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실상에 따른 어두운 감정들은 보들레르의 작품속에 녹아있다.

시에는 그런 작가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보들레르의 시는 우울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선명하다. 작가가 본인의 삶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며 맞선다는 강한 느낌도 든다.

보들레르의 예술적 재능은 그가 시를 출판하기 전에 미술 비평가로 활동했던 1840년대부터 두드러졌다. 보들레르는 예술계로부터 인정받고 있었다.

이후 1850년대 초 그는 추리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엘런 포의 작품을 읽고 자신도 문학으로 성공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갖게됐다. 명성있는 작가였던 포의 음울한 작품 느낌이 자신의 코드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술 비평가, 에드거 엘런 포 소설 번역가로써 문학계에 입문할 준비를 한 보들레르는 자신의 시를 게재하기로 했다. 그러나 솔직하고 우울하고 선정적인, 일반적이지 않은 보들레르의 시는 그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앞서나가있었다. 100편의 시를 엮어 낸 ‘악의 꽃’ 은 불건전하다 등의 이유로 세간의 혹평을 받으며 묻히게 되었다. 보들레르는 이 실패에 크게 실망하고 좌절했다.

하지만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기 때문에 문학 활동은 지속했다. 신문 같은 곳에 시를 써서 올리고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파리의 우울’ 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된다.) 그러나 여전히 출판업계는 보들레르에게 냉담했고 생계 수단이었던 산문시 게재는 중지 당한다.

보들레르는 이렇게 생 마지막까지 시인으로써 인정 받지 못한 채 가난과 건강 악화로 고통에 시달리다가 1867년 생을 마감한다.

보들레르의 시는 그가 죽고 20세기가 되고 나서야 재평가 받았다. ‘악의 꽃’은 후대 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프랑스 대표 시인인 아르튀르 랭보도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은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이렇듯 프랑스 시의 역사에서 보들레르는 프랑스 시 전환점의 기준이 되었다. 살아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보들레르의 시들은 지금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위대한 작품으로 남아있다.


내 젊은 날은, 여기저기 찬란한 햇살 비추었어도,
캄캄한 뇌우에 지나지 않았고
천둥과 비바람에 그토록 휩쓸리어
내 정원에 남은 건 몇 개 안 되는 새빨간 열매.

보들레르 ‘악의 꽃’ 중 ‘원수’ 의 일부
– 2009 문학과지성사


참고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Baudelaire

2009 문학과지성사, 악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