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일본 판화인 우키요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벚꽃을 실크스크린 판화 기법으로 멋지게 표현하는 시나미 나카지마라는 작가의 작품을 좇다가, 우연히 조르조 데 키리코의 ‘거리의 우울과 신비’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따뜻한 색감과 대비되는 차가운 풍경, 강렬한 그림자, 단조로운 듯한 구성이 어우러져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울한 그림이라 하면 명사처럼 떠오르는 뭉크의 그림과 언뜻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도 선이 매우 절제되어있는 듯한 키리코의 그림은 우울을 넘어 체념해 버린듯한 무감정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르조 데 키리코에 대해 조사해보게 되었습니다.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작품을 보면 우울한 꿈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거대한 건축물의 그림자, 텅 빈 거리, 기묘한 인형과 조각들. 이 우울하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인 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키리코의 그림이 우울한 느낌을 주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키리코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1. 혼돈의 시대
키리코가 활동하던 시기는 20세기 초반,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극심한 혼란과 불안에 빠져 있던 때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은 유럽 사회를 깊은 불안과 회의로 몰아넣었고,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사람들에게 무력감과 소외감을 주었고, 키리코 역시 이러한 시대적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키리코는 그 불안한 사회의 분위기를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특히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텅 빈 도시 광장은 이러한 시대적 고립감을 잘 나타냅니다. 사람들이 사라진 공허한 공간,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전쟁의 공포와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상징하며, 그 시대 사람들의 상실감을 표현합니다.
2. 키리코의 정체성 혼란
조르조 데 키리코의 개인적인 삶도 그의 작품이 지닌 우울함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그리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로 이주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삶의 배경은 그에게 뿌리 내리지 못한 정체성의 혼란과 이방인의 감정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없는 느낌을 작품 속에 드러냈습니다.
또한, 키리코는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독일 철학자 니체의 사상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한 회귀’와 ‘무의미한 세계’는 키리코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입니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그의 그림에 존재하는 강렬한 고독과 우울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3. 초현실적인 풍경과 기묘한 요소들
키리코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우울함은 그가 만들어내는 초현실적인 풍경과 기묘한 요소들에서 비롯됩니다. 그의 그림은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데,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확실성과 불안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키리코의 그림에서는 비현실적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와, 어디론가 이어지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거리, 인형같은 인물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관람자에게 일종의 불편함과 공허함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고전적인 조각상이나 건축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들 역시 의도적으로 생기를 잃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영원히 멈춘 듯한 시간, 정체된 공간을 떠올리게 하며, 마치 꿈속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을 줍니다. 키리코는 이런 방식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안과 고립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4. 우울함 속에 담긴 철학적 사유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은 그의 시대적 상황, 개인적 현실, 그리고 철학적 탐구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안정성과 고독, 그리고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의 방황을 표현했습니다. 그가 그린 도시의 텅 빈 광장과 끝없이 이어지는 그림자는 단순히 우울한 감정을 넘어, 인간이 느끼는 깊은 고독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그 시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키리코의 그림이 우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어두운 색감이나 공허한 풍경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이며,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불안과 소외감을 발견하게 됩니다.